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르바노 3세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제172대 [[교황]]. 우르바노 3세는 전임 교황 [[루치오 3세]]와 마찬가지로 과거 교황 [[그레고리오 7세]]의 강력한 후원자이자 [[카노사의 굴욕]] 사건이 일어난 장소인 카노사 성의 주인이기도 한 [[토스카나의 마틸다|마틸다]] 여백작의 영지 소유권 논쟁과 더불어 [[신성 로마 제국]]의 황제 [[프리드리히 1세(신성 로마 제국)|프리드리히 1세]]와의 투쟁을 이어 나갔다. 교황은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이자 [[시칠리아 왕국]]의 여왕 [[쿠스탄차 1세]]와 결혼한 [[하인리히 6세|하인리히]]의 이탈리아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다. 이를 알게 된 하인리히는 이탈리아 남부로 가서 교황에 반항적인 입장을 취하는 [[원로원]] 세력과 손을 잡고,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 북부 [[알프스 산맥]]의 통행을 차단해 [[베로나]]에 머물러 있는 우르바노 3세와 독일 지역의 교황파 인사들 사이의 모든 연락 수단을 막았다. 이로 인해 교황은 프리드리히 1세를 파문하기로 결심했지만, 베로나의 시민들이 이에 대해 거센 반대를 해 교황은 어쩔 수 없이 [[페라라(이탈리아)|페라라]]로 철수하였다. 1187년 우르바노 3세는 [[살라딘]]의 손에 [[예루살렘]]이 함락되어 [[예루살렘 왕국]]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아 결국 세상을 떠났다. [[분류:1120년 출생]][[분류:1187년 사망]][[분류:밀라노 출신 인물]][[분류:이탈리아인 교황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